존재주의 철학이 전후 추상표현주의에 미친 영향

목차

1. 존재주의와 추상표현주의의 만남: 전후 시대정신의 반영
2. 개인의 주관성과 자유의 표현: 추상표현주의의 존재주의적 특성
3. 부조리와 불안의 시각화: 추상표현주의의 존재론적 주제
4. 개인의 책임과 선택: 추상표현주의의 윤리적 차원
5. 초월과 본질의 추구: 추상표현주의의 형이상학적 차원

 

존재주의 철학이 전후 추상표현주의에 미친 영향

 

 ● 존재주의 철학이 전후 추상표현주의에 미친 영향

1. 존재주의와 추상표현주의의 만남: 전후 시대정신의 반영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존재주의 철학과 추상표현주의 예술 운동은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두 개의 중요한 흐름으로 등장했다. 전쟁의 참혹한 경험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환멸감을 안겨주었고, 이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부조리성을 강조하는 세계관으로 이어졌다. 존재주의 철학의 핵심은 개인이 무관심해 보이는 우주 속에서 자신만의 의미와 목적을 창조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은 이러한 존재주의적 정신을 자신들의 작품에 반영했다. 그들은 전통적인 관습을 거부하고 인간의 감정과 경험의 깊이를 탐구했다. 잭슨 폴록, 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와 같은 작가들의 대담하고 즉흥적인 회화는 많은 이들에게 실존적 불안과 불확실성을 안겨준 존재의 혼란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본질을 반영했다.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에게 있어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존재론적 탐구였으며, 사회적 규범과 기대에 둘러싸인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것의 복잡성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그들은 자발적인 붓질, 생생한 색채, 감정적 표현을 통해 전후 존재의 실존적 위기를 이해하고 개인의 자유, 선택, 진정성을 주장하고자 했다.

2. 개인의 주관성과 자유의 표현: 추상표현주의의 존재주의적 특성

존재주의 철학이 개인의 주관성과 자유를 강조한 것처럼,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도 이러한 개념을 자신들의 작품에 반영했다. 그들은 객관적 현실의 재현보다는 개인의 내면세계와 주관적 경험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이는 전통적인 재현 미술에서 벗어나 추상적이고 비대상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은 이러한 존재주의적 자유와 주관성의 표현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고 그 위를 걸어다니며 물감을 흘리고 튀기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이러한 행위 중심의 회화 방식은 예술가의 신체적 움직임과 즉흥적인 결정을 작품에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이는 존재주의가 강조하는 개인의 선택과 행동의 중요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마크 로스코의 색면 추상 역시 존재주의적 개념을 반영한다. 로스코의 대형 캔버스에 펼쳐진 색채의 장은 관람자를 압도하며, 개인의 내면세계와 직접적으로 소통하고자 했다. 이는 존재주의가 말하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과 그 경험을 통한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시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윌렘 드 쿠닝의 작품에서 보이는 격렬한 붓질과 왜곡된 형태 역시 존재주의적 자유와 주관성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드 쿠닝은 전통적인 미적 기준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모순을 드러내고자 했다.

3. 부조리와 불안의 시각화: 추상표현주의의 존재론적 주제

존재주의 철학이 인간 존재의 부조리성과 그로 인한 불안을 중요한 주제로 다룬 것처럼,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도 이러한 존재론적 주제를 자신들의 작품에 반영했다. 그들의 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비정형적 형태, 불안정한 구도, 격렬한 붓질 등은 인간 존재의 불확실성과 불안을 시각화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프란츠 클라인의 흑백 추상화는 이러한 존재론적 불안과 부조리를 강렬하게 표현한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굵고 역동적인 선들은 마치 존재의 근원적 불안정성을 시각화한 듯하다. 클라인의 작품은 형태와 무형태 사이의 긴장을 통해 존재와 비존재, 의미와 무의미 사이의 존재론적 갈등을 드러낸다.

마크 로스코의 후기 작품들, 특히 어두운 색조의 작품들은 존재의 심연과 허무를 탐구한다. 거대한 캔버스에 펼쳐진 어두운 색면들은 관람자로 하여금 존재의 근원적 공허와 마주하게 한다. 이는 존재주의 철학이 말하는 '무(無)'의 경험, 즉 인간 존재의 근본적 불확실성과 마주하는 경험을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잭슨 폴록의 올오버(all-over) 회화 기법 역시 존재론적 부조리와 불안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캔버스 전체에 균일하게 퍼져있는 물감의 흔적들은 중심도, 위계도 없는 혼돈의 세계를 보여준다. 이는 존재주의가 말하는 무질서하고 의미 없는 세계, 그리고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인간의 조건을 시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 개인의 책임과 선택: 추상표현주의의 윤리적 차원

존재주의 철학이 강조하는 개인의 책임과 선택의 중요성은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작업 태도와 그들이 예술가로서의 역할을 인식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존재주의는 인간이 자신의 삶과 행동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적 선택과 표현에 대해 가졌던 태도와 일맥상통한다.

바넷 뉴먼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러한 존재주의적 책임과 선택의 개념을 탐구했다. 그의 유명한 '지퍼' 회화는 단순하지만 대담한 수직선을 통해 관람자에게 직접적인 존재론적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다. 뉴먼은 이를 통해 관람자가 자신의 존재와 마주하고, 그 존재에 대한 책임을 인식하게 하고자 했다.

로버트 마더웰의 작품, 특히 그의 '스페인 공화국에 대한 비가' 연작은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적 선택을 반영한다. 마더웰은 이 작품을 통해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다루면서, 동시에 예술가로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자신의 입장과 책임을 표현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작업 과정 자체도 존재주의적 선택과 책임의 개념을 반영한다. 그들은 전통적인 구상 미술의 규칙을 거부하고, 매 순간 자신만의 독특한 표현 방식을 선택해야 했다. 이는 존재주의가 말하는 '상황 속의 자유', 즉 주어진 조건 속에서 자신의 선택을 통해 자유를 실현해야 한다는 개념과 연결된다.

5. 초월과 본질의 추구: 추상표현주의의 형이상학적 차원

존재주의 철학이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의 본질과 의미를 탐구하는 것처럼,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도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 존재의 본질과 초월적 차원을 탐구했다. 이들의 작품은 단순히 시각적 경험을 넘어 영적, 형이상학적 경험을 제공하고자 했다.

마크 로스코의 후기 작품들, 특히 그의 채플 작품들은 이러한 초월적, 영적 차원의 탐구를 잘 보여준다. 로스코는 큰 규모의 색면 추상을 통해 관람자에게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이를 통해 일상적 경험을 초월한 영적 경험을 유도하고자 했다. 이는 존재주의 철학이 말하는 '한계상황'에서의 초월적 경험과 연결될 수 있다.

바넷 뉴먼 역시 자신의 작품을 통해 존재의 본질과 초월성을 탐구했다. 그의 '지퍼' 회화는 단순한 형태를 통해 복잡한 형이상학적 개념을 표현하고자 했다. 뉴먼은 이를 통해 인간 존재의 고립성과 동시에 우주적 연결성을 표현하고자 했다.

애드 라인하르트의 흑색 회화는 극단적인 단순화를 통해 존재의 본질을 탐구한다. 그의 작품은 거의 모든 시각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써, 관람자로 하여금 존재의 근본적 공허와 마주하게 한다. 이는 존재주의 철학이 말하는 '무'의 경험, 즉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 남는 순수한 존재의 경험을 시각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은 존재주의 철학의 영향 아래,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본질, 의미, 초월성을 탐구하는 심오한 예술을 창조했다. 그들의 작품은 관람자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와 마주하고, 삶의 의미를 성찰하게 하는 철학적, 영적 경험의 장이 되었다.